공자는 난신적자의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해서 개개인의 선한 마음을 호소하여 인(仁)의 사상을 구현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는데, 노나라에 관계된 기록이 쓰여진 『左傳』을 보면 양공 29년 (BC 544)에는 오나라의 公子 계찰(季札)이 노나라를 방문하여 여러
정치․사회․윤리․도덕․예술 등 각 방면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광범위한 지식을 어느 한 사람에게만 배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문인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더불어 다시 周나라로 가서 옛 의례(依例)를 연구하고 노자(老子)를 만나 예를 묻기도 했다. 이때는 공자의
1, 공자의 삶과 철학(공자의 인과 예)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B.C. 551년, 노양공 22년). 그의 조상은 원래 송나라의 귀족이었으나 노로 망명하였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자가 숙량이었다. 그러므로 보통 숙량흘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낳을 당시 10대의 어린
정치를 감화나 교육으로 이끄는 <정교합일(政敎合一)>의 이상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력이나 법의 구속을 가지고 다스리는 것은 패도정치(覇道政治)라 하여 이를 배척했고 어디까지나 천도(天道)를 따른 인륜(人倫) 위에서 교화(敎化)함으로써 스스로 따르게 하는 왕도덕치(王道德治)를 주장
공자일 것이다. 공자는 춘추말기의 저명한 사상가, 정치가, 교육가이면서 유가학설의 창시자이다. 공자는 관학위주로 되어있던 춘추시대에 유가로 민간을 위주로 한 사학을 개창하면서 일생동안 삼천 여명의 제자를 거느렸고 능통한 수제자도 많이 배출해 낸 훌륭한 교육가였다. 공자는 옛날 성현이나
공자및 공자의 제자들까지를 포함한 언행록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대부분은 공자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 스승에 대한 언행을 기록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부는 제 이대의 제자들의 기록이라고 보여지는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논어 20편의 편자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사람의 손으로 된
6. 공자를 비판하다
살아 있을 때와 세상을 떠난 후를 막론하고 공자같이 극도의 숭배와 가혹한 비판이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은 인물은 별로 많지 않다. 사람들은 공자를 마치 하늘이 내린 성자같이 절대시하여 그에 대한 추호의 비판도 용납하지 않으려 들거나 ‘뛰어난 지혜를 타고난 하늘이 내
맹자는 기원전 4세기 전반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이야기로 맹모삼천 이나 단기지계의 가르침이 있다. 젊었을 때 노나 라로 유학하여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하생에게 배웠다. 뒤에 제자들을 이끌고 후거수십승, 종자수백인 이라는 대부대를 이루어 양나라 혜왕, 제나라 선왕, 추나라 목공, 등나라 문공
공자는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신분과 지위에 따라 맡은 바 역할을 다할 때 안정된 사회가 형성된다는 정명사상을 역설하였고, 진정한 사회질서는 강제된 법률과 형벌보다 도덕과 예의로 교화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덕치를 강조하였다. 아울러 그는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이상 사회로 대
공자도 패배한 임금의 뒤를 쫓아 제나라에 갔다(B.C. 517년, 공자 35세 때).
제나라 경공을 만난 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안연-11)."라고 말해 주목을 받기도 한다. 제나라에서의 관직 등용에 실패한 공